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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역사/한글바로알기

훈민정음

옛사람들은 문자라면 모름지기 한자처럼 '형(形, 꼴)'과 '음(音, 소리)'과 '의(義, 뜻)'를 두루 갖춰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를테면 꼴이 '天'인 글씨는 '천'이라는 소리와 '하늘'이라는 뜻을 지녔지요. 그런데 음소 문자로 뜻이 없는 훈민정음은 옛사람들이 보기에 제대로 된 문자가 아니었습니다. 세종이 새 문자의 이름을 '훈민정문(訓民正文)'이나 '훈민정자(訓民正字)'라고 짓지 않은 것은 당시 문자관을 반영하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언문(諺文)'은 훈민정음을 속되게 이를지언정 문자로 받아들이는 의식을 담은 이름이었지만, 한자를 으뜸으로 치는 중세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이규상(李奎象, 1727~1799] 이라는 이가 『일몽고(一夢稿)』라는 책에서 언문 사용은 늘어났지만, 한자 사용은 줄어든 세태를 언급할 만큼 언문은 세력을 시나브로 넓혔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규상은 언문이 머지않아 공문서에 쓰이는 문자가 되리라고 전망하였습니다. 언문과 한자의 관계를 음양설에 기대어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언문을 거의 쓰지 않았을 법한 유학자마저 언문이 널리 퍼지는 게 순리라고 주장할 만치 변화의 흐름은 뚜렷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규상이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이 채 되지 않아서 언문은 그가 예언한 대로 나라 글자라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걸어온 길을 전통적으로 '천대 받으면서 가시밭길을 걸어온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각은 한글의 의미와 가치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스스로 각성하도록 하는 단계에서는 적절한 해석 방법이었을지 몰라도, 우리 문자가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면모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구중궁궐에서 귀공자로 태어났음에도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이 세상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세상의 쓴맛 단맛을 모두 경험한 후에 진정한 우리의 언어 문화의 상징으로 거듭난 문자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한글은 수천 년에 이르는 문자사에서 후대에 등장한 문자입니다. 한글보다 늦게 만들어진 문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한글은 젊은 문자일껏입니다. 우리는 한글을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생각하지만만, 한자나 알파벳보다 역사가 짧기에 한글은 좀 더 갈고닦아야 합니다. 기계화를 넘어서 디지털화를 이룬 현재 한글은 어떻게 진화할까요? 구중궁궐에서 나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광장에 선 한글의 앞날을 꾸려나가는 일은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에요!!